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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도남 우재 양세 유적비문

작성자
taedong5588
작성일
2016-11-18 21:29
조회
506
광산김씨 도남 우재 양세 유적비문
光山金氏 道南 愚齋 兩世 遺蹟碑文

 

선조가 훌륭한 유적이 있으면 자손은 당연히 이를 칭양하여 전(傳)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으로 후손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를 전승케 하여줌이 어떠하겠는가 이는 광산김씨 양세유적비를 세우게 된 까닭이다.

김씨의 선조는 오래 전부터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훌륭한 집안이었으며 그들 중 합천(陜川)이사(伊泗)에 거주하면서 또 다시 일파(一派)를 이룩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추앙(推仰)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그의 선대 도남공(道南公)께서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피하여 이 고을에 처음 거주하면서 그 실마리를 열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우제공(愚濟公)이 뒤를 이어 태어남으로써 양세(兩世)의 아름다운 유적을 계승하여 모두가 문행(文行)과 명성(名聲)이 뛰어났으며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물러나 은거(隱居)를 하면서 모두가 훌륭한 유적(遺蹟)이 있어 국승(國乘)과 향지(鄕誌)에 많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예전에는 오랜 세월로 고증(考證)할 길이 없어 이런 유적이 묻혀버려 칭양(稱揚)하지 못해 온지 수백년(數百年)이었다.

그러나 근세(近世)에 이르러 국가에서 비장(秘藏)해 오던 실록(實錄)이 공개됨으로써 지난 화엽력신사(花葉曆辛巳)(1941년)에 주손(胄孫) 철수(哲洙)와 후손(後孫) 용구(容九)가 역사(歷史)에 수록된 모든 업적을 수습(收拾)하였고 또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참고해 봄으로써 양세(兩世)의 유적을 대략(大略)이나마 알게 되어 어두웠던 일들이 밝혀져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하늘이 나타나듯 명백해졌던 것이다.

이제 모든 후손들이 이를 계기로 도남공의 묘소에 이미 비석을 세운바 있으나 다시 양세(兩世)의 유적을 돌에 새겨 재궁(齋宮)곁에 세움으로써 추모(追慕)의 정(情)을 표하고 또한 후세에 이를 전하고자 중수(仲洙) 용기(容淇) 영보(永輔)가 뜻을 받들어 그 당시의 사적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나를 찾아 오게된 것이다.

내 비록 노병(老病)이 심하나 그들의 성의에 감동하여 이를 사양할 수 없기에 일찍이 도남공(道南公)의 비문(碑文)을 지은바 있지만 또 다시 양세(兩世)의 유적(遺蹟)에 근거하여 이를 함께 서술(敍述)하는 바이다.

도남공(道南公)의 휘(諱)는 지(漬)요 형조좌랑(刑曹佐郞)퇴촌공(退村公) 열(閱)의 손(孫)이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 달전(達全)의 자(子)이다. 두 분 모두 문행과 훌륭한 유적을 남기셨는데 공은 그 전광을 이어받아 그 성품은 맑고 도(道)를 좋아하여 빈(貧)한 생활에도 태연하였으며 세조(世祖) 임오(壬午)(1462년)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그 당시 나라에서 별빙고(別氷庫)를 수리(修理)하던터라 공을 그곳에 파견 독려(督勵)케하여 준공을 보았고 갑신(甲申)(1464년)에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세조(世祖)께서 사정전(思政殿)에 잔치를 베풀고 공을 입시(入侍)케 하고 공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꺾이지 않는 기개(氣槪)와 충성(忠誠)으로 직분을 다하라고 격려를 하시니 이는 남다른 예우(禮遇)인 것이다.

공은 조정에 나아가 직언(直言)으로 숨김이 없고 일찍기 박포(朴苞)와 김진지(金震知)의 죄를 상소하여 준엄하게 간(諫)하자 성상(聖上)은 이를 모두 가상히 여기셨다.

성종(成宗)계사(癸巳)(1473년)에 성주판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노환으로 사직하려 하자 상(上)께서는 친히 교지를 내려 극진히 만류하시고 더욱 힘써 게을리 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으며 을미(乙未)(1475년)에는 상(上)께서 예악(禮樂)이 장차 문란(紊亂)될까 근심하여 공을 성균관 사예 겸 장악원관으로 임명하자 예악을 익히고 다시 이를 정리하였으며 그 후 만경현령 하양 임천군수를 역임하여 모두 치적(治積)을 남겼는데 임천군수로 재직중 절도사 김서형의 뜻을 거슬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공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이들이 공을 무고(誣告)하여 금고(禁錮)의 액(厄)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께서 억울한 액(厄)을 당한 것이라고 분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후 연산(燕山) 난정(亂政)에 아무런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산수(山水)를 찾아 유유자적하니 이 또한 공의 고상(高尙)한 뜻을 엿볼 수 있다.

우재공(愚齋公)의 휘(諱)는 호문(好文)이며 자(字)는 급생(及生)이다. 세조(世祖)무자(戊子)(146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그 후 학문에 힘써 문장과 덕행으로 많은이의 추중을 받았으며 양친을 효성으로 받들어 모든 사람들이 칭송을 하였는데 그는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고 단표(簞瓢)를 낙을 삼더니 성종(成宗)갑인(甲寅)(1494년)에 상(上)께서 강연석(講演席)을 통하여 이와 같은 공의 행의(行義)를 사신에게 전해 듣고 공을 특별히 교하군수로 임명하셨다.

그 후 다시 정란원종공신(靖亂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니 우복정문장공경세(愚伏鄭文莊公經世)와 함께 녹권(錄券)을 받았다. 이 일은 모두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도남공(道南公)이 옥(獄)에 갇히자 상소하여 억울함을 고하고 자신으로 대신 처벌해 줄 것을 청(請)했던 그 성의(誠意)가 간절하여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으며 어버이의 병환(病患)시에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다시 소생(蘇生)하시기를 빌었고 상중(喪中)에는 시묘(侍墓)로 삼년상을 치루는 동안 피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은 그를 지극한 효자라고 일컬었다. 이 일은 군지(郡誌)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있다. 이는 공의 높은 행의(行義)로서 추앙(推仰)되는 것이다.

두 분께서는 태평시대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큰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남공(道南公)의 청명(淸名)과 곧은 절개(節介)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존경(尊敬)을 받았고 우재공(愚齋公)은 문학행의(文學行義)로 몸을 닦아 많은 이의 추앙을 받음으로써 양세(兩世)의 아름다운 업적(業蹟)을 이어 모두가 나라와 고을에서 명성(名聲)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역사(歷史)에 그 업적(業蹟)을 남겼던 일은 어찌 거룩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는 집안의 대통(大統)을 열어준 훌륭한 선조로서 함께 빛나고 함께 전승(傳乘)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부친(父親)이 일으킨 일은 자식(子息)이 이어 간다는 것은 예부터 어려운 일이라 일컬었는데

아! 광산김씨(光山金氏)여 아름다움을 대대로 이으셨네

퇴촌공(退村公)과 집의공(執義公)께서는 앞서서 열어 주시고

도남공(道南公) 우재공(愚齋公)께서는 다시금 전대(前代)의 이어진 일을 계승(繼承)하였네

도남공(道南公)이 벼슬할적에 인군(仁君)을 섬기되 직책(職責)을 다 하셨고

우재공(愚齋公)은 추천(推薦)으로 벼슬하여 효성(孝誠)과 문학(文學)으로 덕(德)을 닦으셨다.

이 양세(兩世)의 훌륭한 유적(遺蹟)이 부작자술(父作子述)이 아니겠는가

전대(前代)를 계승(繼承)하고 후손(後孫)을 열어 주시니 통서(統緖)를 전수(傳受)함이 여기에 있네

오랫동안 묻혔던 일이 나타나기란 성의(誠意)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루어 지겠는가

높다란 이 비석(碑石)에 두 분의 유적(遺蹟)을 함께 기재(記載)하노니

천년(千年)이후 먼 훗날까지 영원(永遠)토록 법(法)이 되어 나타나리라.

광복후 기축(己丑) 계동(季冬)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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