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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남정기 斗南亭記
작성자
taedong5588
작성일
2016-11-18 21:31
조회
527
斗南亭記
八溪之東南 有月里焉, 彌堂居士 崔翁敬恕 隱居講學於其間. 月里者 介在彌泰山下 玉斗峯南, 原野平寬, 屋舍塢集, 無山水之奇, 眺望之勝, 惟二山者 前後拱, 而若궤案焉. 故居士之堂, 舊在村里閭舍間, 名以仰彌者 蓋自堂而可仰者 惟彌山已. 旣而從學諸子 病其陋且隘也. 更相地於里之南爽塏處, 築四楹之亭, 則面勢開豁, 足以攬納宏遠, 盡占一區之勝矣. 乃署其扁曰斗南, 屬余爲記. 或疑前之仰彌者 未始非斗南也, 今之斗南者 亦可以仰彌. 而何前後取舍之不一哉. 余謂不然, 觀殊境異 而名取稱焉. 前之名堂 約而偏者也.
今之名亭 廣而包者也. 蓋前後之實相須, 而豈有意於取舍之哉. 雖然, 抑余因此 而有所感矣.
凡人之取其地 而名堂室者 非徒因其名地偶爾, 蓋有取於其性情氣象之相近者 而寓思焉. 如仁智之 樂山水者 是也.
今夫彌泰玉斗二山者 皆八溪之望, 而其氣象 則有不同焉. 彌泰之岩岩萬丈, 截孼難犯 則有似乎 特立之士 獨行而不顧者也. 玉斗之秀麗雙峰亭亭聳出 則有似乎 高人逸士 소然於物表者也. 善觀者觀於此, 而有取焉, 則亦足以資立身 酬世之方, 而二者亦未嘗不相資也.
余觀居士 自少飭躬구經 淸介自守, 不亂於邪世 則蓋有得於仰彌者 然矣. 而今老矣. 自適於山林煙霞之間 而비예塵애 若有慕於逸士之風者 則斗南之取得 無頻之然乎. 不然, 彌之仰而南於斗者 居是間之所同 而獨居士與斯亭也哉.
昔石守道 隱居조徠之間 而卒之名動一世 則歐陽公稱之 曰조徠之岩岩與惟子之德 魯人之所瞻 蓋美其人與山之相符也. 安知今之不如昔耶 亦在乎勉焉而已. 故余爲之廣其義如此
歲甲申仲秋花山權龍鉉記
두남정기
초계의 동남쪽에 월막리가 있으니, 미당 거사 최경서 옹이 살면서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은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있다.
넓은 들 가운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산수의 기이함과 바라 볼만 한 경치는 없고,
오직 두 산이 앞과 뒤에서 양손으로 껴안아 마치 책상 모양이다.
처음에는 거사의 당(堂)이 동네 가운데 있었고, 앙미당(仰彌堂 : 미태산을 우러러보는 집)이라고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당(堂)으로부터 높이 보이는 것이 미태산 뿐이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따르며 배우는 여러 제자들이 그 누추하고 좁은 것을 염려하여 다시 마을 남쪽, 앞이 탁 트인 밝은 곳에 땅을 가려, 네 개의 기둥이 우뚝 선 정자를 지었다.
그 면모가 열리고 확 트여서, 넓고 먼 곳을 잡아드렸으니, 한 구역의 빼어난 명당이다. 곧 정자 이름을 두남정(斗南亭 : 옥두봉 남쪽에 있는 정자)이라 짓고 나에게 쓸 것을 부탁했다.
어떤 사람이 "전의 앙미당과 지금의 두남정이 옥두봉과 미태산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으니, 지금의 '두남정'을 또한 '앙미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찌 전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취하여 한결같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 옥두봉의 경계가 빼어나게 다른 것을 보고 이름을 얻어서 부른 것이다. 전의 이름인 앙미당(仰彌堂)은 간략하고 치우쳐 미태산만 보이고, 옥두봉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앙미당이라 하였지만 지금의 두남정(斗南亭)은 앞뒤가 확 트여 미태산과 옥두봉을 다 안아서 볼 수 있고 옥두봉 남쪽에 있으니, 옥두봉의 남쪽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두남정"을 지었다. 고로 앞에 붙인 앙미당(仰彌堂)과 뒤에 지은 두남정(斗南亭)의 이름이 상황에 딱 맞아, 버리고 취함에 뜻이 있지 않는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로 인하여 느낀 것이 있다. 무릇 사람이 그 땅을 취하여 당(堂)이나 실(室)을 붙이는 것은 다만 그 이름과 땅에 어울리게 할뿐만 아니라,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의 성품이나 기상에 맞는 것을 취하여 뜻을 붙여 두는 것이니, 마치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이것이라.
지금 저 미태산과 옥두봉은 모두 초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지만, 그 기상은 같지 않다.
미태산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고 위엄이 있어 범하기 어려우니, 곧 빼어난 선비가 홀로 가면서 돌아보지 않는 것과 유사하고, 옥두봉은 수려한 쌍봉이 아름답고 예쁘게 우뚝 솟았으니, 마치 덕이 높은 선비가 속세를 떠나 유연히 가는 풍모와 유사하다. 잘 보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면, 몸을 세워 세상에 베풂에 도움이 되니. 이 두 산은 일찍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거사를 봄에, 어려서부터 몸을 삼가고, 공부에 힘써, 청렴결백하게 스스로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니, 미태산을 보고 깨쳐 얻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늙어 스스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보는 것이 마치 덕이 높은 선비의 풍모(高人逸士=玉斗峯)가 연상되니, 앙미당 보다는 두남정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그대와 이 정자가 있어 우러름을 받을 것이다.
옛날 송나라 때 석수도가 조래산 사이에 은거하였는데, 죽음에 이르러 이름이 일세에 진동하니, 구양수가 그를 칭하기를 "조래산의 뛰어남과 그대의 덕은 노나라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과 산이 서로 부합한 것을 칭찬한 것이다.
거사도 아마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어찌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힘씀에 있을 뿐이라. 고로 내가 이를 위해서 그 뜻을 넓히기를 이와 같이 한다.
1944년 봄 화산 권용현 씀.
八溪之東南 有月里焉, 彌堂居士 崔翁敬恕 隱居講學於其間. 月里者 介在彌泰山下 玉斗峯南, 原野平寬, 屋舍塢集, 無山水之奇, 眺望之勝, 惟二山者 前後拱, 而若궤案焉. 故居士之堂, 舊在村里閭舍間, 名以仰彌者 蓋自堂而可仰者 惟彌山已. 旣而從學諸子 病其陋且隘也. 更相地於里之南爽塏處, 築四楹之亭, 則面勢開豁, 足以攬納宏遠, 盡占一區之勝矣. 乃署其扁曰斗南, 屬余爲記. 或疑前之仰彌者 未始非斗南也, 今之斗南者 亦可以仰彌. 而何前後取舍之不一哉. 余謂不然, 觀殊境異 而名取稱焉. 前之名堂 約而偏者也.
今之名亭 廣而包者也. 蓋前後之實相須, 而豈有意於取舍之哉. 雖然, 抑余因此 而有所感矣.
凡人之取其地 而名堂室者 非徒因其名地偶爾, 蓋有取於其性情氣象之相近者 而寓思焉. 如仁智之 樂山水者 是也.
今夫彌泰玉斗二山者 皆八溪之望, 而其氣象 則有不同焉. 彌泰之岩岩萬丈, 截孼難犯 則有似乎 特立之士 獨行而不顧者也. 玉斗之秀麗雙峰亭亭聳出 則有似乎 高人逸士 소然於物表者也. 善觀者觀於此, 而有取焉, 則亦足以資立身 酬世之方, 而二者亦未嘗不相資也.
余觀居士 自少飭躬구經 淸介自守, 不亂於邪世 則蓋有得於仰彌者 然矣. 而今老矣. 自適於山林煙霞之間 而비예塵애 若有慕於逸士之風者 則斗南之取得 無頻之然乎. 不然, 彌之仰而南於斗者 居是間之所同 而獨居士與斯亭也哉.
昔石守道 隱居조徠之間 而卒之名動一世 則歐陽公稱之 曰조徠之岩岩與惟子之德 魯人之所瞻 蓋美其人與山之相符也. 安知今之不如昔耶 亦在乎勉焉而已. 故余爲之廣其義如此
歲甲申仲秋花山權龍鉉記
두남정기
초계의 동남쪽에 월막리가 있으니, 미당 거사 최경서 옹이 살면서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은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있다.
넓은 들 가운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산수의 기이함과 바라 볼만 한 경치는 없고,
오직 두 산이 앞과 뒤에서 양손으로 껴안아 마치 책상 모양이다.
처음에는 거사의 당(堂)이 동네 가운데 있었고, 앙미당(仰彌堂 : 미태산을 우러러보는 집)이라고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당(堂)으로부터 높이 보이는 것이 미태산 뿐이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따르며 배우는 여러 제자들이 그 누추하고 좁은 것을 염려하여 다시 마을 남쪽, 앞이 탁 트인 밝은 곳에 땅을 가려, 네 개의 기둥이 우뚝 선 정자를 지었다.
그 면모가 열리고 확 트여서, 넓고 먼 곳을 잡아드렸으니, 한 구역의 빼어난 명당이다. 곧 정자 이름을 두남정(斗南亭 : 옥두봉 남쪽에 있는 정자)이라 짓고 나에게 쓸 것을 부탁했다.
어떤 사람이 "전의 앙미당과 지금의 두남정이 옥두봉과 미태산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으니, 지금의 '두남정'을 또한 '앙미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찌 전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취하여 한결같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 옥두봉의 경계가 빼어나게 다른 것을 보고 이름을 얻어서 부른 것이다. 전의 이름인 앙미당(仰彌堂)은 간략하고 치우쳐 미태산만 보이고, 옥두봉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앙미당이라 하였지만 지금의 두남정(斗南亭)은 앞뒤가 확 트여 미태산과 옥두봉을 다 안아서 볼 수 있고 옥두봉 남쪽에 있으니, 옥두봉의 남쪽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두남정"을 지었다. 고로 앞에 붙인 앙미당(仰彌堂)과 뒤에 지은 두남정(斗南亭)의 이름이 상황에 딱 맞아, 버리고 취함에 뜻이 있지 않는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로 인하여 느낀 것이 있다. 무릇 사람이 그 땅을 취하여 당(堂)이나 실(室)을 붙이는 것은 다만 그 이름과 땅에 어울리게 할뿐만 아니라,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의 성품이나 기상에 맞는 것을 취하여 뜻을 붙여 두는 것이니, 마치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이것이라.
지금 저 미태산과 옥두봉은 모두 초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지만, 그 기상은 같지 않다.
미태산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고 위엄이 있어 범하기 어려우니, 곧 빼어난 선비가 홀로 가면서 돌아보지 않는 것과 유사하고, 옥두봉은 수려한 쌍봉이 아름답고 예쁘게 우뚝 솟았으니, 마치 덕이 높은 선비가 속세를 떠나 유연히 가는 풍모와 유사하다. 잘 보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면, 몸을 세워 세상에 베풂에 도움이 되니. 이 두 산은 일찍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거사를 봄에, 어려서부터 몸을 삼가고, 공부에 힘써, 청렴결백하게 스스로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니, 미태산을 보고 깨쳐 얻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늙어 스스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보는 것이 마치 덕이 높은 선비의 풍모(高人逸士=玉斗峯)가 연상되니, 앙미당 보다는 두남정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그대와 이 정자가 있어 우러름을 받을 것이다.
옛날 송나라 때 석수도가 조래산 사이에 은거하였는데, 죽음에 이르러 이름이 일세에 진동하니, 구양수가 그를 칭하기를 "조래산의 뛰어남과 그대의 덕은 노나라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과 산이 서로 부합한 것을 칭찬한 것이다.
거사도 아마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어찌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힘씀에 있을 뿐이라. 고로 내가 이를 위해서 그 뜻을 넓히기를 이와 같이 한다.
1944년 봄 화산 권용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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